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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까치설날 / 이정록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 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요.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루 더 있다 갈게요. 아니 사나흘 더 자고 갈게요. 거짓부렁하게 해주십시오. 뭔 일 있냐? 고향에 그만 오려고 그러냐? 한숨 내쉴 때, 파리채며 쥐덫을 또 수세미로 닦을까봐 그래요. 너스레 떨게 해주십시오. 용돈 드린 거 다 파먹고 가야지요. 수도꼭지처럼 콧소리도 내고, 새끼 강아지처럼 칭얼대게 해주십시오. 곧 이사해서 모실게요. 낯짝 두꺼운 거짓 약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무만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듯, 내 나무그늘을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대대로 건네받으셨다는 금반지는 다음 추석에, 그다음, 그다음, 몇십년 뒤 설날에 받겠습니다. 당신의 고집 센 나무로 살겠습니다. 나뭇잎 한 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 이정록, <까치설날>


시를 읽다가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 버렸고 가슴 어딘가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설날 뵙지 못한 게 20년이 넘었네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이민자들이 한국 명절 때마다 겪는 쓸쓸함이겠지요. 시인처럼 입방정 떨고 구시렁거리더라도 찾아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미 떠나버리신 분들… 악다구니 쓰더라도 만날 수만 있으면 좋겠네요.


“나뭇잎 한 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여기서 ‘당신’은 ‘하느님'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말하는 걸까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지친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그리운 이에게 나뭇잎 나부끼며 살면 되지요. 까치설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복되게 사시길 빕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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