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뜻을 내비쳤을 때
세상은 갑자기 사라진다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는 다른 기분으로
행간은 보이지 않는다
묵독도 낭독도 허락하지 않고
너의 혀는 멀리서 움직인다
길가에 지은 집처럼
너무 많은 밑줄이 너를 지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 여태천, <난독증>
저는 눈물이 많은 편입입니다. 그런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는 말도 가끔 듣습니다. 저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정리를 잘 못합니다. 누구와 싸워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추행범을 쫓아가 잡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는 저를 보고 너무 약해 보인다 하고, 누구는 너무 세다 말합니다. 누구는 보수라 하고 누구는 진보라 합니다. “너무 많은 밑줄”이 저를 지나갑니다.
"ㅎㅎ" 를 읽을 때 다들 다르게 읽으시더군요. 하하, 호호, 흐흐, 히히, 헤헤, 허허... ㅎㅎ가 비웃는 느낌으로 들려서 ^^를 쓰기도 하지만, ^^는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분도 있고, 문화권에 따라 화난 얼굴처럼 보이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가 봅니다. 글의 맥락이나 서 있는 풍경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하겠지요. 겨우 자음 두 개 써 놓은 것도 이렇게 다르게 읽는데, 누군가의 말과 글에는 또 얼마나 많은 난독의 밑줄이 지나갈까요?
날이 갈수록 단정적인 말이 버겁습니다. 사람을 재단하는 날선 말들이 아프고, 뉴스 기사 하나에 쏟아지는 양쪽의 비난에 멀미를 느낍니다. 혹 내가 난독하는 건 아닐까 멈칫 합니다. 성경에 색깔펜으로 혹은 마음으로 그은 수많은 밑줄들은 과연 제대로 읽은 결과일까요? 예수님을 향해 누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고,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막8:28).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라는 단어에 그어진 수많은 밑줄을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바르게 읽은 것일까요?
예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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