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물결 표시 ~ 안에서
그가 긴 잠을 자고 있다
휘자(諱字) 옆에 새겨진 단단한 숫자
'1933년 3월 18일~2010년 4월 22일'
웃고 명령하고 밥을 먹던 거대한 육체가
물결 표시 위에서 잠깐 출렁거린다
햇빛이고 그늘이고 모래 산이던,
흥남부두에서 눈발이었던,
국제시장에서 바다였던
그가 잠시 이곳을 다녀갔다고
뚜렷한 행간을 맞춰놓았다
언제부터 ~ 언제까지 푸르름이었다고
응축된 시간의 갈매기 날개가 꿈틀
비석 위에서 파도를 타고 있다
효모처럼 발효되는 물결 표시 안의 소년
- 한정원, <물결 표시>
지난 달 한국에 갔을 때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성경구절 빼고는 전부 한자로 적어 놓은 묘비가 어쩐지 낯설더군요. 나신 날과 떠나신 날의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두 날짜 사이의 여백이 넓고도 허망해 보였습니다. 61년의 생애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이 시를 읽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두 날짜 사이의 “짧은 물결 표시 ~ 안에서/ 그가 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시인의 눈이 (아마도) 부친의 탄생일과 사망일 사이의 물결 표시(~)에서 한참 머물렀나 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짧은 표시 안에 담긴 아버지의 생애를 봅니다. “웃고 명령하고 밥을 먹던 거대한 육체”였고, 가족에게 “햇빛이고 그늘이고 모래 산"이기도 했던 그의 삶이 저 물결 위에서 출렁거립니다. “흥남부두에서 눈발"이었고 “국제시장에서 바다”였던 그가 이~만큼 푸르른 생을 살았노라고, “응축된 시간의 갈매기 날개"가 파도를 타듯 생생하게 들려 줍니다.
삶이라는 건 '언제부터 ~ 언제까지' 그 사이의 물결인가 봅니다. “1973. 04. 16 ~ ” 이 물결 뒤에 새겨질 숫자를 생각하니 어느새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내 물결은 과연 그때까지 푸르름일 수 있을까요. “오십 세도 못 되었다"며 핀잔을 들었던 청년 예수의 물결은 지금도 온 세상 가득 푸르게 넘실대고 있는데 말입니다(요 8:57). 2023년의 물결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언젠가 내 물결 뒤에 올 숫자를 생각하며 오늘도 푸르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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