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시를 잊은 성도에게 - 병원 / 윤동주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3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


윤동주는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을 원래 이 시의 제목인 ‘병원’으로 짓고 싶어했다지요. 그 이유에 대해 (그의 시들을 직접 받아 세상에 알린 정병욱에 의하면) 그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혹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면서 말이죠. 시인 김응교 교수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아픈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이 문장은 과연 윤동주 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으로 그 아픔에 함께하며 치료를 위해 연대하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말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를 윤동주 식으로 쓴 표현이다. 이 재앙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 김응교, <손모아 - 아침에 읽는 시 이야기 1>, 139.


텍사스 우밸디(Uvalde)의 어느 초등학교, 그 아이들이 쓰러졌던 자리를 생각하며 누워봅니다. 차가운 바닥. 들려오는 비명소리.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시인은 '환자 투성이'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반복되는 총격 사건에 이제는 무뎌지고 무관심해지는 사람들, ‘어차피 안 될이야' 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모두를 초청합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잠시만이라도 누워 보자고.


(손태환 목사)







조회수 47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 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