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여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복, <봄>
제 차례를 기다리던 성격 급한 여름이 그새를 못 참고 먼저 와 버렸네요. 겨울 옷을 그대로 둔 채 여름 옷을 꺼내 입은 한 주였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봄이 ‘눈 부비며’ 더디 오고 있겠지요.
겨울이 유독 긴 시카고에 살며, 그렇잖아도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봄>이 애송시가 되었습니다. 어디서 한눈을 팔고 있는지, 누구와 한판 씨름을 벌이고 있는 건지, 싸우다 지쳐 나자빠져 있는 건지 모르지만,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말에 시렸던 마음이 녹는 듯 합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가난한 자들을 가리켜 “기다림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이라 했는데,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봄은 오고 있을까요? 미얀마의 봄은 언제쯤 찾아올까요? 허리 잘린 조국에 봄꽃은 언제쯤 필까요? 미국 땅에 총기가 사라지는 그 날은 언제 올 것이며, 혐오와 차별이 없어지는 그날은 어느 때쯤 가능할까요?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가 봄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이 있어야겠습니다. 교회가 그런 바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4.16입니다. 9년 째 봄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간절한 저들의 기도가 봄을 흔들어 깨울 바람이 되었습니다. 하여, 마침내 봄이 옵니다. 기어이 오고야 맙니다.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 예수, 우리의 봄이 저기 옵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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