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시를 잊은 성도에게 - 산문시 1/ 신동엽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23일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이미지 출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518.html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신동엽, <산문시 1>


이게 이 땅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은 딴 세상 이야기로 들리네요. 1968년, 아직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보이던 시절에 시인 신동엽은 이런 희한한 세상을 꿈꾸었나 봅니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딸 손 잡고 칫솔 사러 백화점 거리에 가고, 총리가 휴가길에 표를 사러 역 매표구에서 줄을 설 때 역장은 그저 ‘좋으시겠우’ 한 마디 던지고 사무실로 들어가도 되는 나라. 대통령이 자전거에 막걸리 병 싣고 시인의 집에 놀러가기 위해 삼십 리쯤 기꺼이 달려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나라는 어떻게 그런 대통령을 얻었을까 싶었는데, 가만 보니 시 속에 답이 있네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가 한 권씩 꽂혀 있고, 다 대학을 나오지만 농민으로 살아가도 이상하지 않고,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고, 어린이들도 사람 죽이는 건 시늉조차 아니하고, 자기 나라 땅에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나 탱크기지는 억만금 준대도 싫다며 배짱을 지키는 국민들이 있기에 그런 대통령, 그런 나라가 가능한 것이겠지요.


새로운 미 행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시 속의 대통령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국민들은 보고 싶습니다. 아니,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백성들로 채워지는 나라 아닐까요?


(손태환 목사)


조회수 57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 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