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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시 원고를 불태우고 / 이규보



소년 시절 노래라고 끄적거리느라

붓만 잡으면 원체 거침없었네.

스스로 아름다운 구슬처럼 여겨

누가 감히 흠을 잡을까 했네.

나중에 찬찬히 다시 보니까

한 편 한 편 좋은 구절 하나 없구나.

차마 글 상자를 더럽힐 수 없어

아침 짓는 아궁이에 넣어 태웠네.

올해 쓴 시 내년에 보면

똑같이 지금처럼 던져 버리고 싶겠지.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은 이런 까닭에

오십이 되어서야 시를 썼다지.


-이규보, ‘시 원고를 불태우고’(‘焚藁;焚三百餘首’), 김하라 역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는 술과 거문고와 시를 너무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는 별명이 있었다지요. 어린 시절부터 ‘붓만 잡으면 원체 거침없었'던, 그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나 봅니다. 헌데, 스스로 ‘누가 감히 흠을 잡을까' 자신만만했던 시를 어느 날 ‘찬찬히 다시 보니' 좋은 구절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글 상자를 더럽히는 글로 보입니다. 결국 아침 짓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리는데, 이날 태운 시가 300여편이라고 합니다.


가끔 지난 설교 원고를 보며 같은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어떻게 이런 설교를 하고도 그리 자신만만했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런 설교에도 은혜 받았다는 분들이 계셨으니 성령께서 하신 일이 신비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전 설교 원고 파일을 다 없앴다는 어느 선배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공감했습니다만, 차마 못 버리고 머뭇거리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올해 한 설교 내년에 보면 똑같은 마음이겠지요.


설교원고를 아궁이에 넣고 싶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한 저의 삶이 글자들 사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설교일수록 더합니다. 흠없어 보이는 설교일수록 제 흠이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설교자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스스로 끝내 다 살아낼 수 없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사람입니다. 평생 부끄러움을 안고서 그 하늘의 명령에 순명(順命)하는 자입니다. 이 천명(天命)이 들려올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설 그 한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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