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엎드려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 정현종, <어떤 성서>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라니요. 여린 몸뚱아리 지켜줄 그 집을 스스로 벗어버렸던 말인가요? 무겁고 힘겨워도 이게 있어야 안전하다고, 끙끙대며 인생의 짐 지고 사는 우리에게 한 말씀 주시는 건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 앞에 내려 놓았던 짐, 예배 끝나고 다시 지고 가는 우리를 일깨워 주는 건가요?
욕망과 근심의 짐을 한가득 안고 남들 다 가는 넓은 길 서둘러 걷는 인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아주 좁은 그 길'을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가로질러 갑니다. 자기를 버리고 걷는 십자가의 길, 그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가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주목받지 못해도, 제자리 걸음인 듯 느려도, 주어진 삶의 오솔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갑니다.
타인의 속도에 조급해하지 않고, 남들 가는 넓은 길 부러워 않고, 안전한 제 집 대신 제 십자가 지고 좁은 길 가는 이에게서 우리는 육화된 말씀을 봅니다. 문자에 갇히지 않은 산 말씀, 온 몸으로 쓰는 주님의 편지를 읽습니다. 엎드려서 천천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이를 향해 누군가는 말할 겁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고후 3:3a).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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