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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84p / 박준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 있었습니다


- 박준, <84p> 중에서


사랑하는 이가 아팠나 봅니다. ‘약을 오래’ 먹을 만큼 오래 앓으며 자던 ‘당신’이 ‘늦은 해’와 함께 일어나 창을 엽니다. 창을 열고 어제의 옷 터는 소리를 들은 시인은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시 제목으로 보아 84페이지에서 멈추고 책을 덮은 모양입니다. 책을 덮으니 창밖으로 ‘새’ 책이 펼쳐집니다. 84p에 간신히 이르는 동안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었겠지요. 그제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누군가/무언가의 소리에 반응하는데 필요한 건 청각이 아니라 마음의 감각입니다. 비 오는 소리에 이리저리 염려하며 “우짜노’하는 바로 그 마음의 다정함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마음의 반응에서 멈추지 않고, “하고 있던 일을 덮”습니다. 언제든 덮을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처럼. 아, 우리는 왜 하던 일을 덮어야 할 순간마다 마음을 덮었을까요? 왜 잠시 멈추고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인류 구원의 위대한 일을 이루려 가시면서도, 만나는 딱한 사연들마다 그 앞에 멈추셨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보살피기 위해 오늘 내가 덮어야 할 84p는 어디일까요?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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