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시를 잊은 성도에게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최종 수정일: 2022년 8월 8일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를 쓴 한강의 시입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실린 첫 시이지요. 시인은 막 지은 밥에서 피어 오르는 김을 보다가 멈칫 합니다. 깨달음의 순간이자, 시가 찾아오는 경험이었겠지요. 영원히 사라진 것들이 있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무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빈 자리에 앉아 시인은 밥을 먹습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듯, 김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밥을 입 안에 넣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 날에도 밥을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만져지지 않는 그 부재의 자리에서 밥을 입 속에 넣었습니다. 김훈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야말로 대책없고 “진저리나는 밥”이었습니다. 무언가 누군가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밥을 먹고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진저리나는 일상이자, 정성스럽게 살아내야 할 일상입니다.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자각이 내 앞에 있는 것들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김처럼 사라져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한껏 살아내려는 몸짓으로 밥숟갈을 뜹니다. 그것이 매일 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손태환 목사)



조회수 154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시를 잊은 성도에게 - 꽃은 꽃 숨을 / 홍순관

꽃은 꽃 숨을 / 홍순관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쉽니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쉽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숨을 쉬고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쉽니다. 나는 내 숨을 쉽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창조주의 기운이 물 위에 감돌 때인데, 아마 하나님은 물 위를 서성이시며 여러 표정으로 얼굴도 비추어 보고 재미난 구상을 하셨을 테지요. 세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