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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별을 보며/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이성선, <별을 보며>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는데, 이성선 시인은 자신이 하늘을 너무 쳐다보아 하늘과 별이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합니다. 얼마나 맑은 마음이면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것일까요? 그를 가리켜 왜 “시혼이 너무 맑아 유리 보석처럼 반짝이던 설악의 시인”이라 불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주저하는 마음' 아닐까 자주 생각합니다. 숲길에 들어서며 혹 나 때문에 나무와 이끼와 풀이 괴로워 하지 않을까 주저하는 마음. 간척산업과 경제효과를 운운하기 전에 갯벌의 미생물과 갯지렁이와 ‘검은머리쑥새’를 생각하며 주저하는 마음. 나로 인해 저 맑고 아름다운 것들이 더럽혀지지 않을까 주저하는 마음.


너무 쉽게, 함부로 부르는 예수 이름도 자주 민망합니다. ‘주여 삼창'을 안 하는 이유이고, ‘할렐루야로 환영합시다'를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때문에 그 귀한 이름이 싸구려 되는 것이 속상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들먹이는 “예수도 그랬다"는 말에 분노합니다. 너무 귀하기에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주저함이, 너무 아름답기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수줍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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