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성도에게 - 시인의 용도 2/ 마종기
- heavenlyseed
- 4월 26일
- 2분 분량

하느님,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 못 하게 하세요.
어두운 골방에 앉아 하루 종일 봉투 만들고
라면으로 끼니를 잇는 노파를 아신다면,
하느님, 내가 외롭단 말 못 하게 하세요.
쉽게는 서울 남쪽 변두리를 걸어서
신흥 1동, 2동 언덕배기 하꼬방을 보세요.
골목길 돌아서며 피 토하는 소년을 아신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영양실조도 있었어요.
하느님, 내가 사랑이란 말 못 하게 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아직 인자(人子)로 살아 있을 적에도
먼지 쓴 신자(信者)의 회초리가 드세기도 하더니
세계의 곳곳에는 그 사랑의 신자들 가득하고
신자에게 맞아 죽은 신자들의 시신(屍身),
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고
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 들어 보세요.
고통도, 사랑도, 말 못 하는
섭섭한 이 시대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마종기, <시인의 용도 2>
노회로부터 소속 목사임을 증명하는 아이디 카드를 받았습니다. 매년 받는 카드인데, 사실 쓸 일은 거의 없습니다. 별 용도가 없지만 혹시 필요할까 해서 지갑에 넣어 둡니다. 문득 오늘날 목사의 용도가 그런 건 아닐까 싶어집니다. 누군가에게는 신앙도 그렇겠지요. 평소에는 별 쓸모가 없으나 혹시 필요할 때를 대비해 아주 버리지는 않고 한쪽에 보관해 두는.
시인은 “어두운 골방에 앉아 하루 종일 봉투 만들고/ 라면으로 끼니를 잇는 노파”를 떠올리며 하나님께 차마 고통스럽다는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언덕배기 하꼬방”에 살며 “피 토하는 소년”과 “영양실조” 걸린 아이를 알기에 외롭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 합니다. 사랑을 말하는 신자가 다른 신자를 죽이고 “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어버리면서도 “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이들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건 시인에게 차라리 고통입니다. 시인이 “고통도, 사랑도, 말 못하는/ 섭섭한 이 시대”를 살면서 그는 “시인의 용도는 무엇”인지 묻습니다.
너무 쉽게 고통과 사랑을 말하는 우리에게 저 ‘섭섭함’은 낯선 감정입니다. 그걸 알려주는 시인이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용도’를 묻고 있는 그의 질문이 곧 시인의 용도일지도 모릅니다. 아픈 성도를 바라보며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늘 ‘목사의 용도’를 묻습니다. 기도 외에 뭘 해야 할 지 몰라 질문을 던지지만 늘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묻지 않으면 정말 쓸 데 없는 목사가 되겠지요. ‘세상을 변화시키자’며 우리의 용도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했던 교회도 이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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