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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우리들의 어린 王子(왕자) / 오규원




뒷집 타일 工場(공장)의 경식이에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더니 동그라미라 하고

연탄장수 金老人(김노인)의 손주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K식품 회사 손계장의 딸 연희는 빵을 보고 빵이라 하고 연희 동생 연주는

돼지 새끼를 보고 돼지 새끼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물어봐도 경식이는

동그라미를 동그라미라 하고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연희는 빵이라 하고 연주는 돼지 새끼라 한다.

또다시 물으니 묻는 내가 우습다고 히히닥하며

나를 피해 다른 골목을 찾는다.


정답 만세!

그리고 정답 아닌 다른 대답을 못하는

우리들 어린 王子(왕자)와 公主(공주)에게 만세 부르는 우리의 어른들 만세!


- 오규원, <우리들의 어린 王子(왕자)>


여기서 ‘만세’를 곧이곧대로 들으면 곤란하겠지요? 뭔가 잘못하고 있는 아들을 보며 엄마가 “아주 잘 한다”라고 해서 그게 정말 잘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반어적 표현을 통해 상대가 그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끔 비틀고 환기시키는 것이죠.


이 시에서 아이들은 ‘정답’만을 말합니다. 재차 물어도 답은 언제나 정답입니다. 당연한 걸 물어보는 화자를 이상하게 여기며 피합니다. 시인은 “정답 아닌 다른 대답을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어른들을 향해 뒤틀린 ‘만세’를 외칩니다.


그리스도인은 – 김승희 시인이 말한 것처럼 –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거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짜 놓은 정답에 저항하며 다른 대답을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정답 아닌 다른 대답”을 못합니다. 기계적인 정답만을 되뇔 뿐입니다. 다시 묻는 이들을 보면 불편해 하거나 “우습다고 히히닥하며” 피합니다. 전혀 다른 대답을 시도했던, 아니 다른 대답 그 자체였던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임을 잊은 건 아니겠죠?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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