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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이사 / 이해인

최종 수정일: 4월 27일

몸이든

집이든

움직여야 살아난다

포기해야 새로 난다


욕심도 물건도

조금씩 줄이면서

선선히 내어놓고

제자리로 보내면서


미련 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어야

이사를 잘 한 거다


옮기는 것이

결코 짐이 되지 않는

가벼운 날


그런 날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 없는 날이겠지?


  • 이해인, <이사>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습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서둘러 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집을 짓고 있었는데, 우리 집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매일 공사 현장에 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습니다. 첫 내 방이 만들어지고, 부엌 바닥을 열면 내려갈 수 있던 지하실이 생기고, 예쁜 정원이 펼쳐지고… 물론 아버지 사업 부도 때문에 4년도 채 못 살고 단칸 방으로 이사가야 했지만,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우리 집 짓는 모습을 보던 그날들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 합니다. 


요즘 그때가 자주 생각납니다. 다음 주면 이사갈 집에 괜히 한 번 더 가보고, 슬슬 이삿짐을 싸며 마음은 어느새 초등학생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생애 첫 내 집을 마련하던 어머니 아버지 마음도 궁금해지고, 그 집을 놓고 떠나실 때 심정은 어떠셨을까 질문도 던져 봅니다. 무얼 버리고 무얼 가져가야 하나, 선택이 가장 어렵네요. 책장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다가 겨우 두 권 포기합니다. 아내도 옷장 앞에서 고민하겠지요. 부디 저는 데려가 주길 바랍니다. 


“몸이든/ 집이든/ 움직여야 살아난다/ 포기해야 새로 난다.” 잘 버리고 조금씩 줄이며 미련없이 웃을 수 있어야 이사 잘 한 거라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언젠가 주께서 마련하신 집으로 이사가는 그날, “옮기는 것이/ 결코 짐이 되지 않는/ 가벼운 날"에, 미련없이 환하게 웃도록, 연습 잘 해보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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