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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11월 / 나희덕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19일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나희덕, <11월>


‘마지막 잎새’ 덕분에 다시 살 용기를 얻은 소녀도 있었다던데, 바람은 매정하게도 그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납니다. 세상에 남겨진 서러움에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는 뜻밖에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해 감사하고 있네요. 눈물까지 흘리며, 세상에나.


안 그래도 따뜻한 눈길 하나 못 받는 길가의 풀들인데, 빗줄기마저 더럽히며 지나가니 참 딱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화창한 햇살도 아니고 ‘희미한 햇살’이 ‘잠시’ 드는 것 뿐인데, 길가 풀들이 드러누워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네요. 햇살 한 조각도 감사하단 말인가요?


사형수로 독방에서 지내며 자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햇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지요.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 정도였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한 장 크기였답니다. 그 한 조각의 햇볕이 살 이유가 된 것이지요.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 11월. 미리 껴 입은 외투 사이로 스며드는 추위는 다가올 고통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하겠지요. 그래도 ‘남겨진 자비'와 ‘희미한 햇살'에도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우리도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로 반짝반짝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


해피 땡스기빙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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