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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묵상 포인트 (11/19-25)



이번 주 묵상본문: 욥기 15-20


욥 15장은 욥과 친구들의 토론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되는 곳이며, 엘리바스의 연설 또한 다시 시작된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 그 입술로 불경건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욥의 불평이 하나님 앞에서 ‘묵도’해 온 그들의 경건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 앞(4장)에서 다소 부드럽고 온화하게 시작한 엘리바스의 언어가 점점 격해진다. 마음에 불만을 품은(12절) 욥에게 불만을 느끼며,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는(13절) 욥을 향해 분노한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14).


엘리바스는 욥이 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며 욥이 죄를 인정하기를 촉구한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으며, 심지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장막은 불타는(34)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이 세상에서 의인도 고난 받을 수 있고 악인도 형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더 큰 고통으로 몰아간다.


16장에서 다시 욥의 반론이 이어진다. 욥의 다섯 번째 연설이다. 욥은 엘리바스가 자신을 이해하기보다 악인으로 간주하여 상처를 받고 엘리바스에 대해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 표현한다(1). 친구들의 위로가 오히려 재난이다. 누군가를 향한 내 위로가 ‘재난을 주는 위로'는 아니었을까? 욥은 자신을 시들게 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8).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로 대하신다. 그분이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신다(14).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자신이 죄가 없음을 항변한다. 땅을 증인으로 소환하고, 자신의 증인과 중보자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18, 19). 자신의 결백을 눈물로 주장하는 욥은 죽음의 문턱에 있다. 17장 1-2절은 죽음을 예감하는 욥의 탄식이다. 이제 무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예상하며 욥은 하나님에게 담보물을 달라고 요청한다(3). 자신을 담보로 맡기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부르는 욥에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15). 희망의 요청은 이렇듯 절망의 언어로 표현되는 법이다.


18장에서는 수아 사람 빌닷이 등장하여 악인의 곤경과 그의 최후의 멸망을 다시 주장한다. 빌닷 역시 첫 번째 발언(8장)보다 강한 어조로 욥을 몰아간다. 욥에게 언제쯤에나 말을 그치고 자신과 친구들의 조언을 듣겠냐고 나무란다(2). 악인은 한때 빛날지도 모르지만 결국 빛은 꺼지고(5),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다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악인의 최후가 이러하다는 교훈으로 삼을 것이다(21).


이런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의 대답이 19장에 나타난다. 욥이 볼 때 친구들의 말은 그를 짓부수는 말이었다(2). 욥은 정의를 찾으나 보이지 않는다. 폭행을 당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 현실, 정의가 보이지 않는 땅의 현실을 경험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돕기보다 오히려 멀리 떠나버린다. 결국 고통 당하는 자는 “낯선 사람"과 “타국 사람"이 된다(13, 15).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나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21).


그런데도 20장에서 소발은 여전히 악인의 몰락을 주장하며 욥의 항변을 그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으로 평가한다(3). 자신의 말을 “슬기로운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이라며 자기 우월감을 은근히 드러낸다(3). 자신의 앎으로 타인의 무지를 깔보며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틀림을 증명하려는 태도이다. 내게는 그런 면이 없었을까 돌아보자. 이번 주 나의 말이 누군가를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 되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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