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성도에게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heavenlyseed
- 10월 11일
- 1분 분량

(사진출처: 나무위키 "배롱나무")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야만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복면을 쓰고 총을 휴대한 자들이 도심가를 휘젓고 다니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아빠가 아이 앞에서 체포되어 끌려가고, 기도하던 목사의 머리를 겨냥하여 후추탄을 발사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주방위군 투입에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일터도 교회도 가지 못한 채 외출을 삼가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내전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마저 들려옵니다. 대체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요즘 그 시대(“그 여름”)를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은 어땠을까, 자주 생각합니다. 그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이들은 어떻게 그 엄혹한 시절을 견뎠을까요? 어떻게 수차례의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냈을까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기력감을, 비겁한 자신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절망을, 그들은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이겨내긴요. 그저 몸부림치며 버텨냈을 뿐. 절망을 마치 “장난처럼” 붉은 꽃들로 피워냈을 뿐. 그 여름 폭풍의 한가운데서 백일을 견뎌내며,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그 장한 백일홍처럼! 아, 우리에게도 이 여름의 끝이 오겠지요. 그때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빌며 자비하신 주님 앞에 희망의 손을 모읍니다.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손태환 목사)
*이 시에서 말하는 '나무 백일홍'이 배롱나무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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