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성도에게 - 시 / 이정록
- heavenlyseed
- 2일 전
- 1분 분량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년 찾기다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이정록, <시>
지난 주일 소개해 드렸던 시 <소설>의 어머니께서 또 한 말씀 전하시네요. 힘들어 죽으려고 하다가 껌정 고무신에 적힌 “진짜”라는 글자 하나 덕분에 살아왔다는 그 어머니요. 이번에는 무려 ‘시’를 논하십니다. 이정록 시인이 본래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라고 했는데, 아마 어머님께 배운 모양이네요.
우리 속담에 “업은 아기 삼 년 찾는다”는 말이 있지요. ‘무엇을 몸에 지니거나 가까이 두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엉뚱한 데에 가서 오래도록 찾아 헤매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국립국어원). 꼭 요즘 제 모습 같네요. 별 수 있나요. 아기가 어느 날 문득,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업고 함께 사는 거지요. 내 곁에 있었는데도 몰랐던 시가 나를 불러줄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겁니다.
설교 준비할 때 늘 느낍니다. 본문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더군요. 말씀이 저를 불러줄 때까지, 하얀 잇몸 보이며 웃어줄 때까지. 삶이 막막하고 답이 없어 답답할 때도 그렇지 않을까요? 때론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내 곁에 숨어있던 은총의 빛이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안개가 걷히며 내 앞에 있던 길이 이제 마음 놓고 걸어 가라고 말해줄 때까지, 내 삶에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시던 그분의 다정한 음성이 비로소 들릴 때까지.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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