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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톱과 귤: 고백 1 / 유희경

최종 수정일: 2023년 7월 1일


톱을 사러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철물점은 문을 닫았길래 좀 먼 곳까지 걸었어요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샀습니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귤 담은 비닐봉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지 뭔가요 후드득 귤 몇 개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습니다 귤을 주워 주머니마다 가득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는 얼굴을 만나 귤 몇 개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한두 개쯤 흘린 것 같은데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귤이 자라 귤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귤을 심으면 귤이 자라나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귤 나무가 자라면 이 톱으로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귤은 모두 꺼내두었는데도 그 뒤로 한 며칠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않아요 톱이요? 톱이란 게 늘 그렇듯이 쓰고 어디다 잘 세워두었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유희경, <톱과 귤: 고백 1>


원래는 한 5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목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박사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이제는 학자의 길을 가야겠다 하던 무렵에 이민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감리교에서 교단까지 바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요.


원래는 안부 전화였습니다. 뉴저지에서의 목회를 사임하고 낯선 쉼을 누리던 어느 날, 시카고 사는 목사님과 통화하던 중 ‘마침 기쁨의교회 담임목사가 사임했으니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적어도 1년은 목회를 못하겠다고 생각한 제 계획과 달리, 결국 5개월 만에 시카고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꼭 이런 일이 생깁니다. 원래 계획했던 건 어느새 사라지거나 잊혀지고, 전혀 계획에 없었던 것이 끼어들어 내 삶에 아예 자리를 잡아 버리는 일 말입니다. 원래 사려고 했던 톱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계획에 없던 귤은 며칠 동안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처럼.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싶은 순간이 있으신가요? 괜찮습니다. 내 삶에 향기를 남기시려는 주님의 손길은 종종 그렇게 다가오니까요.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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