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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감사하는 마음/ 김현승



마지막 가을 해변에 잠든 산비탈의 생명들보다도

눈 속에 깊이 파묻힌 대지의 씨앗들보다도

난로에서 꺼내오는 매일의 빵들보다도

언제나 변치 않는 온도를 지닌 어머니의 품 안보다도

더욱 다수운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


지금 농부들이 기쁨으로 거두는 땀의 단들보다도

지금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저녁 항구의 배들보다도

지금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주택가의 포근한 불빛보다도

더욱 풍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들을 모두 잃는 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받았기에

누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

추방에서

맹수와의 싸움에서

낯선 광야에서도

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리었다


허물어진 마을에서

불 없는 방에서

빵 없는 아침에도

가난한 과부들은

남은 것을 모아 드리었다

드리려고 드렸더니

드리기 위하여 드렸더니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마음만 받으시고

그 마음과 마음을 담은 그릇들은

더 많은 금은의 그릇들을 보태어

우리에게 돌려 보내신다

그러한 빈 그릇들은 하늘의 곳집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 김현승, <감사하는 마음>


달력을 한 장 남겨둔 채 돌이켜 보니 쓸쓸하고 낯선 한 해였습니다. 이 와중에 맞는 추수감사절이 어색합니다. 감사 제목을 묻는 질문에 멈칫합니다. 그러다 이 시를 반복해서 읽어 봅니다. 추방당한 자리에서, 맹수와 싸워야 하는 낯선 광야에서 제단을 쌓고 첫 열매를 드리며 감사했던 용감한 조상들을 떠올립니다. “받았기에/ 누렸기에/ 배불렀기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하박국을 떠올리는 이가 저만은 아니겠지요?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은혜의 불빛 앞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본래 인생은 벌어먹는 것이 아니라 빌어먹는 것임을 아는 이의 고백이지요. 하여, 이 시의 마지막 시구를 읽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차오릅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나를 알고 내 삶의 주인을 아는 것, 삶이 오직 은총임을 아는 것, 감사는 거기서부터 피어납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시길 빕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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