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성도에게 - 세수 / 이정록
- heavenlyseed
- 6월 14일
- 1분 분량
빨랫줄처럼 안마당을 가로질러
꽃밭 옆에서 세수를 합니다, 할머니는
먼저 마른 개밥 그릇에
물 한 모금 덜어주고
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습니다
수건 대신 치마 걷어올려
마지막으로 눈물을 찍어냅니다
이름도 뻔한 꽃들
그 세숫물 먹고 이름을 색칠하고
자두나무는 떫은 맛을 채워갑니다
얼마나 맑게 살아야
내 땟국물로
하늘 가까이 푸른 열매를 매달고
땅 위, 꽃그늘을 적실 수 있을까요
이정록, <세수>
어릴 적 마당에 있던 펌프로 대야에 물 받아 세수하던 기억이 새롭네요. 펌프가 마르면 마중물 붓고 몇 번 펌프질 하면 신기하게 물이 나왔지요. 그 물 받아 등목하던 시절이 그립네요. 이런 시를 읽을 때마다 과거가 또 한 걸음 성큼 다가오는 걸 보니 나이가 드나 봅니다.
할머니의 세수는 매일의 의례와 같습니다. 내 얼굴 적시기 전에 강아지 마른 목 먼저 축이려고 마른 개밥 그릇에 물 한 모금 덜어줍니다. 얼굴은 얼의 골이라고 했던가요? “골진 얼굴 뽀득뽀득” 닦을 때, 얼의 골짜기마다 구석구석 물이 흘러갑니다. 세수할 때마다 얼(영혼)을 닦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 또한 예배가 되겠지요. 마른 수건은 가족들에게 양보하시고 치마 걷어올려 눈물을 찍어내는 할머니의 세수, 그 마음 담긴 물이기에 꽃들도 받아 먹어 이름을 색칠하고 “자두나무는 떫은 맛을 채워”갔겠지요.
나를 씻은 땟국물이 누군가를 병들게 할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맑게 살아야 나를 씻은 물로 누군가를 살리고 무언가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요? 내 얼을 씻은 물이 누군가의 얼을 맑게 해 주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생명수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6). 주님의 세숫물로 부지런히 씻어야겠습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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