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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세종의 언어, 정음 / 홍순관

10월 10일
2분 분량

*출처: 홍순관 페이스북 2026.09.11 포스팅


세종은 타고난 재능과 목숨을 다하여 이 나라에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계급의 문제와 소통의 문제에 있어서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계급의 문제라고 한 것은, 언어가 갖는 권력을 말한다. 문자를 모르면 문자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 사이는 갈수록 멀어진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한 일은 당시 세종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반대했다. 학문이 깊고 견문이 넓은 지식인일수록 맞섬의 세기는 강했고 집요했다. 게다가 문자를 만드는 어려움은 단순히 반대하는 정치인들, 지식인들을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한자로만 세상을 살았던 모든 구조와의 싸움이었다. 세종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설득해내는 일이었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에는 세종 스스로와의 싸움이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화석처럼 굳어진 관념과 무심한 세월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죽하면 임금이 문자를 만들고도 온갖 반대에 부딪혀 두 해를 넘는 동안 백성들에게 알리지 못했을까. 이 혹독한 어려움을 이겨낸 혁명이 바로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다.

신하들뿐 아니라 백성들도, 임금이 하는 이야기를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백성들은 몰라도 된다는 아니, 어쩌면 몰라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바로 이 부분이 왕인 세종과 당대 지식인, 정치인들과 완전히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혁명이다. 살던 방식과 개념을 흔들고 깨고 뒤집은 일이다. 

모든 백성들이 사는 뜻과 이치를 알기 바라며 중국글자가 아닌, 내 나라 글자로 사람 사는 일을 이루며 살라는 것이 지도자가 가진 뜻이었다.

세종 이전까지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느끼고 경험한 모든 표현을 남의 나라 글자로 써야 했다. 말을 하고도 그 말을 종이 위에서 본 적이 없었다. 이 나라 사람을 만나면서도, 이 나라 풍경을 보면서도, 이 나라 말을 하면서도 모든 기록은 한자로 했다. 우리에게 제대로 된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자가 가진 미세한 느낌과 정서와 감정을 남의 나라 것으로 쓰면서 살아야했다. 인간이 표현을 못하고 사는 것만큼 답답한 일도 없을 텐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마음껏 내 마음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ㄱ’이라는 자음 한 글자보다, ‘ㅏ’라는 모음 한 글자보다 우리에게 더 나은 문명이 있을까. 다석 유영모는 훈민정음을 ‘하늘의 계시’처럼 생각했다. 이 나라에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고 하였다. 글을 몰라 멸시받고 뜻을 펼치지 못한 백성에게 글을 만들어 주어 사람답게 살 길을 열어주었으니 백 번 옳은 말이다. 이 강산에 살았던 사람역사를 곰곰이 더듬어보아도 이보다 더 큰일은 없었다. 

세종이 백성에게 가르치려고(훈민) 했던 글자는 ‘정음’이었다. 정음은 글자 그대로 ‘옳은 소리’다. 백성들이 하는 말을 문자로 만들었으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말하고, 우리 글로 쓰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 했던 말, 해야 할 말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말을 우리글을 붓으로 쓰는 것이 한글서예다.

세종의 언어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땠을까.


한글날을 맞아 이 글을 읽었습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글서예가, 홍순관의 글씨로 읽었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문자로 만든 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남의 글자로 세상을 이해하던 우리나라에 주신 ‘하늘의 계시’이자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석처럼 굳어진 율법을 깨뜨리고 견고한 성이었던 성전 체제를 무너뜨린 예수 복음 역시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온 인류에게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 할 만합니다. 점점 힘을 잃어가는 교회의 언어를 보며 훈민정음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주년에 스스로 묻습니다. 


‘정음’과 ‘복음’이 제대로 만나면 어떤 혁명이, 어떤 경사가 벌어질까?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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