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교와 교회 갱신의 가능성 (이보교 전국 심포지엄 발표)

이보교와 교회 갱신의 가능성


손태환 목사 (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시카고 이민자보호교회 TF 위원장)


1. 들어가며: ‘공공의 적’이 한국 개신교회


작년 6월 초 한국의 엠브레인 트렌드 모니터에서 한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 조사를 실시하였고, 지난 8월 목회데이타연구소에서 그 결과를 분석해서내놓았다. 불교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온화한(40.9%), 절제하는(32%), 따뜻한(27.6%) 등의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고,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는 온화한(34.1%), 따뜻한(29.7%), 윤리적인(23%) 등 역시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았다. 반면 개신교인들의 경우에는 거리를 두고 싶은(32.2%), 이중적인(30.3%), 사기꾼같은(29.1), 이기적인(27.3%), 배타적인(23.0%), 부패한(22.1%), 세 종교 중 유일하게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인 것으로 나타났다.


위 조사가 광화문에서의 대규모 집회와 소위 ‘교회발 코로나 확진’ 사례들이 심각해지기 전에 실시한 것임을 감안할 때 지금 조사한다면 훨씬 더 부정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교회가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말이 들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민교회의 정황은 조금 다를 수 있겠으나, 교회에 대한사회의 신뢰도가 점점 약화되고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교회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갱신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지만사회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2. 교회의 공공성 회복, 가능한가?


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많은 원인이 있겠으나, ‘복음의 공공성 상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교회는 사사화된 복음을 통해 기독교인들을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에 머무르게 했다.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르면서도 세상을 닮은 이기적 종교 집단으로서의 교회상은 이런 토대 위에 세워졌다. 사적 영역에만 머무는 복음은 온전하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하다. 교회는 개인의 구원과 개교회의 성장을 넘어 복음이 가진 힘을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한국 교회 갱신은 복음의 공공성 회복없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의 독특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공론장에서 소통할 수 있는 공적 신앙의 현재적 모델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런 모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도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세 가지 정도를 간단히 생각해 보자.


첫째, 기독교의 공공성 회복을 교회의 잃어버린 영향력 확보로 오해하는 이들 때문이다. 성도가 줄고 교회의 대사회적 위상이 줄자 자신들의 지분을 빼앗겼다는 위기 의식이 생겨났고, 이것은 곧 정치적 힘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지적한 바, 특정 종교가 공적인 삶에 철저히 침투해야 한다는 “종교 전체주의”(religious totalitarianism)”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미로슬라브볼프, <광장에 선 기독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4), 13쪽.)


둘째, 오늘날 한국교회에 공론장에서 소통하기 위한 공적 언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사적 영역에 머물러온 개신교 신앙 언어가 공적 영역에서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하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공공성과 충돌하는 이유는 사적인 신앙 언어를 신앙의 특수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고, 사적인 신앙고백적 언어가 공론장에서 공적 담론으로 연결된다는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분석한다.(김동춘, “왜 한국 개신교 언어는 공공성에 충돌하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7217)


셋째, 기본적으로 공공성은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확장되는데, 한국 교회는 타자를 포용하고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일에 소극적이거나배타적이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인이 나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파커 J. 파머가 말하듯이, 공적인 삶을 풍부하게 하고 공공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낯선 자들과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낯선 이를 적으로 여기는 한 시민사회는 물론, 교회 역시 존립할 수 없다. (파커 J. 파머, 김찬호역,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2012), 157-193쪽.)


3.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모델로서의 이보교 운동


그렇다면, 이민자보호교회(이하 이보교)는 위 세 가지 한계를 극복하며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완벽한 답은 아니어도 적어도 하나의 모델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이보교는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세워지지 않았다. ‘강도 만난 우리의 이웃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했을 뿐이다. 공적 영향력이 목표가 아니라 공공의 선이 목표였다. 공공의 선을 추구할 때 공적 영향력은 따라온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갱신’ 자체는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이보교는 교회 성장이나 부흥을 위한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의 공공성을 회복하면서 자연스럽게교회가 갱신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오랫동안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목표와 함께 그 일을 교회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 강박적 신념 혹은 교만함이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아이디어나 리소스를 활용할 수는 있으나 그들과 함께하지는 않았다. 이보교는 교회와 법률가들과 시민단체가 더불어 연대한다. 기본적으로 이민자보호 ‘교회’ 운동이기에 목회자들이 전면에 나서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활동은 세 그룹의 긴밀한 협력과 연대로 이루어진다. 법률가들과 시민단체는 교회에 전문성을 제공하고, 교회는 인적 물적 영적 자원을 제공한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위의 책에서 한 다음의 말이 이보교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나의 목표는 기독교 공동체가 많은 행위자 중 하나가 된다는 현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서 있든지 –주변부든, 중심부든, 아니면 그 사이 어디 있든지—그곳에서 인간의 번영과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볼프, 위의 책, 120쪽)


둘째, 이보교는 기독교 신앙 언어가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번역되어 사용될 수 있는지 실험 중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동안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우리들만의 언어 혹은 사적 신앙 언어로 사회에 전달하며 무례한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사회는 기독교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어법을 폭력적으로 받아들였고, 교회는 그런 사회의 반응에 당황해 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공통의 언어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없으니 소통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보교 활동을 하며 얻은 가장 큰 유익 중 하나는 교회와 시민단체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데 있다. 매주 모여 함께 기도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며 서로의 어법과 어휘(vocabulary)를 배웠다.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신앙의 언어를 사회에 전달할 것인지 고민했고, 법률가들과 시민단체는 우리의 어젠다를 교인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더 나은 전달 방법을 고민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배워온 ‘도피성’이 실제 추방위기에 놓인 서류미비자가 피신할 수 있는 ‘센터교회’로 번역될 수 있음을 보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이야기가 어떻게 불안에 떠는 DACA 청소년들을 위한 드림 법안이나 포괄적 이민개혁을 위한 촉구 내용 속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어떻게 서류미비 싱글맘들을 위한 렌트비 지원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교회에서 들어온 신앙의 언어들이 어떻게 공적 영역에서 실제로 실천되고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본 것이다.


셋째, 이보교는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함께 살리는 힘이라고 믿는다. 지난 수 년 동안 미국 사회는 이민자, 난민, 외국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 혹은 두려움을 강화시켜 왔다. 이민자들이 미국의 정체성을 위협할 것이며,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국가 안보를해친다는 두려움이다. 문제는 이런 낯선 이(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배제와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보교는 낯선 이를 적으로 규정하려는 흐름에 저항하며 그들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이웃임을 알려왔다. 외인에 대한 환대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믿기때문이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은 물론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우리를 확장시킨다. 어쩌면 정체되고 쇠퇴하는 교회가 살 길은 낯선 존재와의 계속적인 접촉을 통해 우리의 정체를 새롭게 하고 내면을 넓히는 길 밖에 없을 지 모른다. 파커 파머가 뉴욕에서 만난 택시 기사와의 일화는 이에 대한 좋은 예다.


“글쎄요, 어떤 손님이 탈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조금 위험하기는 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요. 대중을 알아야 해요. 거기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걸 배운답니다. 대중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생각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니까요. 꼭 학교에 다니는 거 같아요.”(파머, 위의 책, 158쪽.)


4. 나가며





혼두라스의 Choluteca(촐루데카)라고 하는 지역에 있는 다리. 1930년대 미군에 의해서 건설될 당시, 아무 문제없이 훌륭한 다리였다. 그런데 얼마 후 허리케인 미치(Mitch)가 들이닥치고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그래도 다리는 아무 문제 없이 살아남았다. 문제는 다리가 아니었다. 다리는 그대로 있는데, 강이 옮겨져 버렸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인해서 물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이 다리는 여전히 훌륭해 보이는 다리였지만,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다리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저 다리와 같아 보인다. 역사의 흐름은, 혹은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교회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사회 속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포기할 수 없는 다리를 붙들고 강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것인가, 아니면 강의 흐름을 따라 새로운 다리를 지을 것인가?


만일 새로운 다리를 짓기 원한다면, 이민자보호교회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과거 기독교 사회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겸손히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고, 신앙 언어를 공적 담론으로 바꾸며 번역해 나가는 실험을 계속하고, 낯선 이에 대한 환대를 교회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면, 교회 갱신은 가능할 것이다. 본래 모습이어야 할 그 교회로의 갱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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