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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이원규

속도/ 이원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일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왜 백 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침내 비닐하우스 속에

온 지구를 구겨 넣고 계시는,

스스로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시는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신학교 졸업 후 가장 먼저 목회 나갈 것 같았던 예상이 계속 엇나가고, 과거에 가르쳤던 제자가 먼저 목사 안수 받는 처지가 되자 주변에서 이런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너무 늦은 거 아냐?” 사실 전도사 신분으로 담임목회를 하다 보니 조급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주문처럼 되풀이하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느려도 바르게. 우보천리(牛步千里).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서로 만날 일도 없는 토끼와 거북이를 굳이 동화책에 등장시켜 경주를 시키는 것이 인간들이지요. 지리산에서 제 속도로 사는 시인은 묻습니다. “왜 백 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속성재배 되는지도 모르고 살지만 백 년을 넘지 못하는 인간은 “한 오백 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느티나무의 우직한 속도를 상상조차 못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고 멈춰 섰던 세상이 다시 빠르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뭐가 그리도 급한 지… 좀 느리게 가면 이내 불안해지는 것은 우리의 죄성 아닐까요? 조급해지려는 마음 꼭 잡고 제 속도로 걷도록 해요. 주께서 함께 걷는데 좀 늦으면 어때요. 골인 지점 따위 아예 지워버리고요.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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