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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사랑의 전당 / 김승희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 김승희, <사랑의 전당>


가난해서 고구마, 감자, 수제비를 많이 먹던 젊은 시인은, 어느 날 버려둔 고구마에서 작은 싹들이 나고 얼마 후엔 푸른 줄기와 잎사귀가 올라오는 걸 보고 놀랐답니다. 흙이 없는데 어떻게? 물었더니 친구가 답하더랍니다. “흙이 없으니 자기 살을 파먹고 자랐겠지.” 그러고 보니 고구마 속이 뭉그러져 있더랍니다.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 시인이 생각했다지요. 사랑은 그런 것이구나. 


사랑한다는 건 아프다 못해 “얼굴이 썩어들어” 가는 일인데, 그 고통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일이랍니다. 그래서 사랑은 ‘으리으리’한 일이라고, 그것은 ‘회색 소굴 지하 셋방’에서도 피어나는 것이니 분명 으리으리한 거라고 힘주어 거듭 말합니다. 사랑하기에, 절벽인 줄 알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니 당연하지요. 예술의 전당, 명예의 전당에 비할 바가 아니죠.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보다 으리으리한 데를 본 일이 없습니다. 아프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아는 이가 있나요? 그런 사랑은 없으니 알 도리가 없지요. 


사랑한다는 건 본래 상처받을 가능성에 몸을 던지는 것. 그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할 만큼 했다, 하시며 돌아서지 않으시고 끝내 나무에 달려 꽃피운 그분의 사랑. 무덤에서 피어올라오는 저 부활의 꽃. 아, 십자가! 으리으리한 사랑의 전당.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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