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묵상포인트 (8/24-30)
- heavenlyseed
- 8월 21일
- 3분 분량

시편 122-135편
시 122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중 세 번째로서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이 주를 이룬다. 순례자는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다. 출발 때부터 그의 마음은 기쁘다(1). 시인은 예루살렘에 평화(샬롬)가 있기를 구하며 축복한다(6-9).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지금은 이름이 무색할 만큼 불화의 땅이 된 그곳을 생각하며, 우리 주변과 세상의 샬롬을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123편에서 시인은 ‘하늘에 계시는 주’께 눈을 든다(1). 자신의 아픈 처지를 봐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눈(2)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들을 향한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넘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가.
12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다섯 번째 노래이며, 주께서 과거에 곤경으로부터 건져주신 사실을 기억하라고 노래한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현재의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1,2) 묻는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다(7).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125편에서 순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영원한 안전’에 대해 노래한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시온산에 비유한다(1). 시온산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음 같이 그는 안전할 것이다. ‘악인의 규’(3), 즉 악인의 권세가 힘을 잃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손에 규를 들고 의지하거나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모두가 자신의 규를 내려놓을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126편은 과거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한 기억과 감사(1-3), 그리고 지금의 고난 가운데서 구원에 달라는 기도로 이루어진다. 바벨론 포로에서 조상들을 해방시키신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남방 시내들 같이’(4), 즉 네겝의 사막에서 물이 흐르는 일 같은 일이다. 아직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견뎌야 하는 고난이 남아 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다(6). 127편은 여덟 번째 순례자의 노래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1)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획은 헛될 뿐이다. 이것을 믿고 평안히 잠드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는 중에도 복을 주신다(2).
성전으로 올라가는 아홉 번째 노래인 128편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 노래한다(1,4).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2)이라는 명제는 당연한 듯 보이나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므로 그것은 내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은혜이고 복이다. 또한 그런 사회가 되게 만들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129편은 열 번째 순례자의 노래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찬양한다. 주변 민족들과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마치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만드는 것 같았다(3). 하지만 주께서 그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다(4). 결국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지붕의 풀”같이 버림받게 될 것이다(5-6). 그 어떤 악과 고통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놓을 수 없다.
130편은 죄를 회개하는 대표적인 참회시이다. 시인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는다(1). 아마도 죽음의 위기나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 처한 듯 하다. 그곳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고 주님의 구원과 용서를 구한다. 그 간절함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다(6). 영혼의 아침을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열두 번째 순례자의 노래인 131편은 짧지만 주님을 향한 가장 깊은 신뢰를 보여준다. 시인은 이제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고 고백한다(1). 자신의 한계를 알고 철저히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이다. 그는 어머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처럼 친밀함과 만족함 속에 놓여있다(2). 그에겐 어떤 다른 욕심과 바람도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132편은 시온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담고 있다. 시인은 먼저 법궤와 성전에 대한 다윗의 사랑과 열정을 회상한다(1-5). 다윗은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 전에는 침상에 오르지도 잠들지도 않겠다고 서원할 만큼 성전과 주님의 임재를 갈망했다. 결국 법궤를 찾아 예루살렘에 안착할 때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다 기뻐 찬양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들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믿는다. 따라서 옛 순례자들이 성전을 바라보며 그분의 나라를 그렸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와 그분이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한다.
133편은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노래이다. 공동체가 함께 연합하여 거주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1).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에 대해 시인은 기름이 제사장의 머리에서 옷깃으로 내려오는 모습과 헐몬 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모습으로 비유한다. 134편은 성전에 오르는 순례자의 노래 중 마지막 노래이다. 밤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제사장과 무리가 하나님을 송축한다. 오랜 순례 여정을 마치고 성전에 도착한 사람의 심정을 그린다. 비록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우리의 순례가 마치는 날에 하나님 앞에서 부를 찬양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을 내자.
135편은 창조 때부터 가나안 땅의 분배 사건까지의 역사를 회고하며 찬양하는 시다. 시인은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여호와의 창조를 노래한다(5). 출애굽 사건은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상들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16). 나도 모르게 섬기고 있는 우상은 무엇인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사는지 돌아보자.
참고: 김영봉, <시편의 사람>,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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