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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잊은 성도에게 - 아버지의 모자/ 이시영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나가시는 것이었다.


- 이시영, <아버지의 모자>


상실의 아픔을 표현하는 여러 반응들이 있겠지요. 곡을 하며 울 수도 있고, 애써 괜찮은 듯 눈물을 삼킬 수도 있고요. 이 시의 오촌당숙은 아버지 방에 들어가 말 없이 앉아 있습니다. 고인이 머물던 자리에 앉아 그 부재를 느끼며, 혹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추모식을 갖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더니 아버지 모자를 들고 나오며 한 마디 던집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이 당숙에게 아버지의 모자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를 계속 기억하기 위한 추억의 물건이자 아버지 삶의 일부이고, 어쩌면 아버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자를 쓰고 단호히 걸어갈 때 아버지의 삶의 길은 당숙의 걸음을 통해 이어집니다. 죽음으로 끝났던 아버지의 시간이 ‘사립 밖으로’ 다시 열립니다.


한철진 집사님께서 너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새벽예배 자리를 어김없이 지키던 분이셨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예배당에 오지 못하게 된 이후로도, 댁에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집에서도 늘 양복을 차려 입고 예배하셨습니다. 친교 시간이면 미처 못 나온 교우들 위해 떡을 챙겨주시고, 집에서 기른 깻잎과 상추를 젊은이들에게 나눠 주시곤 했습니다. 이제 그런 집사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하고 시린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한 집사님의 모자를 쓰실 분 계신가요? 그 새벽기도의 자리를 대신하실 분, 교우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 이어가실 분. 그런 가족들과 교우들이 있다면, 한 집사님의 삶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모자를 받아 쓰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부터 이 십자가는 내가 지겠다, 말하고 그렇게 걷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한철진 집사님의 영혼을 주께서 받으시고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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